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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토크

11월호

픽셀에서 첨단 기술에 이르기까지

신작 선보이는 사일로랩·추미림

이제 곧 서울융합예술페스티벌에 공개될 사일로랩·추미림의 신작이 완성되고 있는 작업실을 찾았다.

사일로랩SILO Lab.
공학·디자인·영상 등을 배경으로 하는 미디어아티스트들이 모여 설립한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스튜디오. 다양성과 시간성을 가진 설치 작품을 통해 추상적인 개념을 현실 공간에 물리적인 실체로 구현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단독 전시를 비롯해 예술의전당·국립아시아문화전당·서울미술관 ·롯데뮤지엄·덕수궁 등에서 열린 전시에 참여하거나 프로젝트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리얼 미디어아트 공식
사일로랩
이들이 만든 공간에 들어서면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요즘 현란한 기술로 무장한 미디어아티스트가 많지만, 사일로랩의 작품에는 빼어난 기술력 이상의 무엇이 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이영호 대표와 공학을 전공한 박근호 대표를 포함해 다섯 명이 힘을 합쳐 2013년 정식으로 출발한 사일로랩은 현재 36명이 모여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한다. 상업 프로젝트와 아트워크를 모두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특히 사일로랩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아트워크는 모든 구성원이 의견을 내 진행하는 편이다. “물론 디렉션을 주고 방향을 제안할 때도 있지만 다 같이 생각을 나누고 공유해요. 작품이 들어설 각 공간이 어떤 감흥을 줄지 상상하고 서로 설득하죠. 아이디어는 언제나 열려 있어요.” 서울융합예술페스티벌에서 선보이는 신작 <시유時有>도 그렇게 탄생했다. 목재로 만든 함 안에서 동그랗게 엮은 실타래가 돌아가는 동안 “시간의 새로운 균형, 흘러가는 시간의 실재를 마주할 수 있는 작업”이다. “가느다란 실이 이어지는 연속적 덩어리에서 시간 개념을 끄집어냈어요. 완전한 구 형태에서 출발한 실타래가 비정형 형태로 이동하는 과정 자체를 시간의 흐름으로 설정한 거죠. 개념적인 시간의 흐름과 형태, 나아가 삶이나 생명의 의미까지 나타냅니다. 각각의 셀 안에서 실이 풀려나가면서 완전한 구 형태가 조금씩 변화하는데, 생명체를 보호할 수 있는 집 같은 형태로 그리드를 설정하고 미묘하게 서로 다른 우연적 움직임을 통해 살아 있는 형태를 표현하고자 했어요.”

사일로랩, <시유(時有)>, 2023, 실타래, 나무, 모터, LED, 301×762×377cm

“요즘 대중은 미디어아트라고 하면 주로 큰 벽면에 송출되는 영상을 떠올릴 거예요. 사일로랩의 작업물이 미디어아트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미디어를 섞되 좀 더 물성 있는 매체를 활용하려고 해요. 그래서 관람객이 결국은 미디어아트를 물성이 있는 작업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실재가 주는 아우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작품에선 조명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해요. 목재와 실이라는 소재가 조명을 통한 연출·음악과 어우러져 총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시각적 아우라가 중요하거든요. 항상 공감각적인 작품을 기획하는 만큼, 이런 느낌 자체가 사일로랩의 특징이 되면 좋겠어요.” 사일로랩의 작품이 유독 남다르게 와닿 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물성을 바탕으 로 실재하는 미디어아트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라 는 것. 뛰어난 기술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일로랩 의 작품은 완전히 공간에 몰입하게 만드는 특유 의 분위기가 매력이다. “화려한 영상과 기술을 위주로 하는 흐름 보다는 조금 다른 선택지나 시각을 제안하고 싶어 요. 기술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첨단 기술로 임팩트를 주는 것도 좋지만, 오히려 기술을 드러내지 않을수록 훌륭한 것 같아요. 주변에 있는지도 모르는 디자인이 잘된 디자인이라는 말이 있죠. 기술이 효과적으로 숨겨지면 좋겠어요. 이건 사일로랩 모두의 생각이에요. 의미를 강요하거나 단정짓지 않아도 모두가 무언가를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작품을 오래도록 곱씹으며 생각하고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거죠. 우리의 가장 큰 목표는 작품을 오래 볼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사일로랩이 애써 만들어놓은 공간의 분위기 속에 관람객이 스며드는 과정이 필수적인데, 그 과정을 어떻게 끌어낼지 고민하고 있어요.” “텍스트로 작업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자연 현상처럼 바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더 중요시해요. 예를 들어 물의 일렁임을 보더라도 주입된 이미지가 아니라 관람객이 이전에 느낀 감정이나 무드를 떠올릴 수 있도록 감정을 끌어내는 데 중점을 두죠. 순간의 분위기나 이미지, 느낌을 강조하다 보니 주로 감성적이고 정적인 작업이 나오는 것 같아요. 메시지나 텍스트를 전달하려고 의도하지 않고 ‘주제가 없는 것’이 곧 우리의 주제가 되면 좋겠어요. 의도를 규정하거나 주입하지 않아도 관람객이 자연스럽게 스며들 듯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작품은 사일로랩에게도 큰 도전이다. 그동안 사일로랩의 작품만을 위해 짜여진 완벽한 공간 안에서만 작품을 선보였지만, 서울융합예술페스티벌에선 다른 작품과 함께 전시되기 때문이다. “항상 먼저 시뮬레이션을 돌려 예측하고 공간의 방해 요소를 미리 계산했는데 이번엔 오히려 반대예요. 오픈된 공간에 다른 작품과 함께 놓이죠. 그만큼 결과물이 더욱 기대됩니다. 주변 상황과, 다른 작품이 어떻게 배치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함께 어우러질 결과물이 저 역시 궁금합니다.” 대중의 머릿속에 우리의 작업과 특징이 미디어아트의 한 부류로 인식되기를 바란다는 이들의 바람이 서울융합예술페스티벌을 통해 이뤄지기를 바란다. 내년 상반기 오픈을 목표로 파주에 사일로랩 전용 전시관을 짓고 있는 만큼, 대중의 뇌리에 ‘사일로랩=미디어아트’ 공식이 깊이 각인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듯하다.

추미림.
디자인과 순수미술의 경계에서 그리드와 픽셀을 조형언어로 사용하며 웹과 데이터 기술 전반을 작업 주제로 삼아 작품세계를 펼치고 있다. 디지털 화면의 가장 작은 단위인 정방형 픽셀과 위성지도로 내려다 본 도시 경관에서 추출한 도형을 작업 모듈로 활용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과 한화드림하우스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미지의 디지털 시공간으로
추미림
추미림과 픽셀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학생 때부터 픽셀 아이콘 만드는 일을 한 작가는 픽셀을 확대해 점처럼 찍어나가며 형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추미림은 자신이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재료인 픽셀로 주변 환경을 작품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는 환경은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제가 신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 신도시 풍경 안에서 안정감과 자연스러움, 심지어 노스탤지어를 느껴요. 오히려 일반적인 자연은 제게 두려운 미지의 대상이에요. 신도시라는 구조에서 태어나 배양된 저의 인공적이면서도 일상적인 느낌을 작품에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뿐만 아니다. 나아가 온라인의 가상 공간 또한 추미림이 주목한 또 하나의 주변 환경이다. “동시대 사람들이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사회관계망서비스 같은 환경을 마치 내가 살아가는 도시라고 생각하는 거죠. 오히려 제게는 자연환경이 미지의 대상으로 보이고, 사람들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인공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환경이 더욱 가깝게 느껴져요.”

그래서 그런지 추미림의 픽셀 풍경화는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일상적이되 새롭다. 게다가 ‘위성 시점’을 활용하면서 이 느낌은 배가된다. “일상을 주제로 작업할 때 일상과 나 자신을 떼놓고 생각하기가 어려워요. 나와 도시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고, 어떤 렌즈를 활용해 바라볼 것인지 고민했죠. 제가 작업을 시작할 당시에 구글 어스Google Earth라는 프로그램이 등장했고, 그동안 제가 살았던 도시를 전부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물리적으로 갈 수 없어도 책상에 앉아서 시각적으로 여행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거예요. 문득 상공에 올라가 그 정도 거리를 두고 무언가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성 시점은 픽셀을 찍은 그래픽 툴 같기도 해서 더 흥미로웠죠. 도시라는 장소는 지저분하기도 하고, 소음도 있지만 상공으로 올라가서 바라보면 아름다워요. 물론 기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기하학적이고 낯설기도 했죠. 위성 시점을 통해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어요.” 활동 초기에는 살았던 장소, 경험한 장소를 재현하는 작업이 많았지만, 이제는 관심 주제가 데이터로 넘어오면서 데이터가 혼합된 장소를 창조하거나 새로운 환경을 상상하기도 한다. 서울융합예술페스티벌에서 선보이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문화역서울284 구 역장실 공간에서 ‘달로 가는 정거장’이라는 주제에 맞춰 마치 기관사가 된 것처럼 자신을 설정한 작가는 “가상의 기차가 목적지인 달/미래로 출발해 상공로 떠올랐을 때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관람객과 함께 달/미래로 향한다. 올여름 개인전에서 선보인 <컨베이어>를 출발점 삼아, 신작을 더해 <비스타Vista>라는 이름으로 묶어냈다.

추미림, <Vista>, 2023, 루프 비디오 설치, 75인치 TV 4대, 컬러, 사운드, 투명/거울 아크릴 조각, 가변 크기, 5분

“매일밤 잠들기 전 스마트폰을 쥐고 있다가 결국 얼굴에 떨어트려야 끝나잖아요. 이런 정보의 컨베이어 위에서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속도나 흐름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데이터, 화면, 속도, 도시에 관한 네 개의 영상 작품이에요. <비스타>는 ‘새로운 경치’를 의미해요. 파노라마와 비슷한 뜻이죠. ‘윈도 비스타Windows Vista’도 하나의 사용자 환경이잖아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제목이에요. 관람객에게 경치를 제안하고 어떤 미래로 향하는 거죠. 이제 우주에도 도시가 생기기 직전인 것 같아요. 인류는 또 새로운 도시 환경을 만들 거예요. 마치 열차 같은 긴 화면에 영상 작업을 선보이면서, 열차가 더 이상 지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허공으로 올라가는 듯 색다른 속도감을 느끼길 바라요. 긴 열차를 타고 지나가는 풍경을 관찰하듯이 제 작품으로 미래적 풍경을 제안하고자 해요.” 추미림은 새로운 시각성과 속도를 확보하기 위해 화면으로 들어가기도, 위성 시점에서 바라보기도, 우주로 향하기도 하고, 옆에서 보기도 하는 등 다양한 시각을 활용하고 제안한다. 빠르게 지나갔다 천천히 움직이는 추미림의 영상은 그만큼 관람객의 시선을 오래도록 붙잡는다. “요즘 사람들은 숏폼이나 릴스 같은 짧은 영상 콘텐츠에 시각이 최적화돼 있어요.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고 반복해요. 제 작품도 시작과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어서 계속 들여다보게 되고, 이를 ‘데이터 멍’(멍하니 바라보는 행위) 혹은 ‘화면 멍’이라고 불러요.” 추미림은 전시실이라는 환경에 관람객이 찾아오고, 서로 케미스트리를 일으켜 마음속 스위치가 켜지기를 바란다. 교감과 소통을 넘어 먼 이야기가 아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큰 목소리를 내며 메시지를 전하는 작업도 있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동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조용하게 제안하고 싶다고 말한다. 추미림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나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추미림의 작품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백아영 미술 저널리스트
사진 K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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