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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토크

9월호

정책과 현장, 예술과 지역을 잇다
창작공간의 지난 10년과 앞으로의 10년

세월이 가는 걸 본 사람도, 나무가 크는 걸 본 사람도 없는데 세월은 가고 나무는 자라난다. 이제 10년을 맞이하는 창작공간도 그렇다. 장르별·장소별 공간 기획과 개관 준비 등에 매진했던 10년 전, 그리고 이후 예술가 인큐베이팅 공간이자 도시재생을 위한 지역거점, 지역주민의 문화향유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그곳의 시간들은 어떤 퇴적층의 무늬를 만들며 지금에 이르렀을까.

당초 서울시 창작공간은 2007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컬처노믹스’ 전략의 일환으로 유휴공간을 활용한 창의기반 조성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이는 문화예술을 통한 도시재생을 포함, 예술가에게는 창작공간을 제공하고 그러한 창작활동이 시민 문화향유로 확대 재생산되는 지역거점형 문화공간을 조성한다는 취지이기도 했다. 이후 박원순 서울시장의 마을공동체 정책과 연결되며 주민 워크숍, 커뮤니티 아트 등과 같이 지역과의 소통 채널을 찾는 것에 주력하는 등 다양한 실험이 이어졌다.

물론 재단 내부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2008년 재단 내에 창작공간 기획과 운영 준비를 위한 ‘창작공간추진단 TFT’가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이후 2012년 창작공간본부로 공식 직제화되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조직으로 운영됐다. 또한 2013년 서울시 위탁사업에서 재단 고유사업으로의 이관과 그에 따른 계약직 직원의 정규직 전환, 2015년 재단 예술지원사업의 이관 등 재단 예술정책의 한 축으로, 또한 예술 생태계의 자생력 확보를 위한 성공적인 지원 모델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적잖은 성장통을 겪기도 했다.

1 금천예술공장 <2019 다빈치 크리에이티브> 페스티벌 나잇 오프닝 행사. 카샤 몰가(Kasia Molga)의 ‘휴먼센서’(Human Sensor) 공연.
2 연희문학창작촌 <2018 연희극장>.

창작공간의 성장과 진화

거미가 그물을 만들기 위해선 첫 줄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이는 첫 줄이 질기고 강해야 다음 줄을 계속 엮을 수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거미는 첫 줄을 칠 때 힘을 가장 많이 쏟는다. 창작공간 또한 그랬다. ‘창작공간추진단 TFT’가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통합적 공간기획과 개별적 장르 배분, 이외에도 지역적 특성이나 기존 유휴공간의 형태를 감안한 공간 설정까지, 당시 정말 많은 고민과 사전 준비를 필요로 했다.
이렇게 고단한 과정 끝에 비로소 2009년 6월 홍대 앞에서 문화예술 플랫폼 ‘서교예술실험센터’가 창작공간으로서 첫 울음을 터뜨렸고, 이어 시각예술 국제레지던스를 표방한 ‘금천예술공장’(2009년10월), 국내 최초의 공예 레지던스인 ‘신당창작아케이드’(2009년 10월), 도심형 문학 창작공간 ‘연희문학창작촌’(2009년 11월), 문래창작촌 지원공간 ‘문래예술공장’(2010년 1월), 국내 최초의 예술치유전용공간인 ‘성북예술창작센터’(2010년 7월, 이후 ‘서울예술치유허브’로 명칭 변경), 어린이 전용 예술교육공간인 ‘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2010년 12월), 무용 및 시각예술 지원공간인 ‘홍은예술창작센터’(2011년 5월, 이후 ‘서울무용센터’로 명칭이 변경되며 무용지원공간으로 집중) 등이 차례로 개관했다.
물론 이들보다 앞서 조성된 ‘서울연극센터’(2007년 11월)와 국내 최초 장애예술인 레지던스인 ‘잠실창작스튜디오’(2007년 10월 조성, 2011년 1월 재단 이관) 또한 창작공간에 포함되지만, 여기에서는 창작공간추진단 TFT 이후인 2008~2011년으로 논의의 중점을 두고자 한다.
이렇듯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쓰나미적 공간 확산 속에 너무도 많은 것이 기억의 편린으로 스쳐갔지만, 무엇보다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 공간들의 개관 준비 과정이다. 약 10년 전인 2008~2010년, 당시 창작공간은 성공적인 개관을 위해 온 힘을 쏟아 붓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직원들에게 창작공간은 과업으로 부여된 ‘실존적 명사’이기도 했지만, 땀과 눈물로 부대끼며 만들어낸 ‘실천적 동사’였다. 콘셉트 설정-공간 기획-입주작가 공모-프로그램 기획 등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일련의 과정을 어떤 노하우나 선례에 대한 답습 없이 이루어내야 했으니 말이다.
물론 개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 공간마다 예술적 부피와 문화적 질량, 지역적 빛깔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그곳을 거친 직원들의 노고를 다시금 논하여 무엇 하랴. 아마도 공간마다 드리워진 시간의 지층 위에는 직원들의 땀과 눈물, 함께한 예술가들의 열정이 켜켜이 쌓여 있을 것이다.
때론 관 주도의 정책, 예술의 경제적 수단화와 같은 냉철한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고, 서울시 또는 재단의 정책 변화에 따라 너무도 많은 상황적 함수와 복잡한 다층적 이해관계가 작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창작공간은 국내외 예술가들의 창작-교류의 플랫폼으로서, 창작-향유를 연결하는 지역거점형 문화향유공간으로 성장과 진화를 거듭해왔다.
모든 공간에 획일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인 레지던스 지원뿐 아니라 문래예술공장 <map>, 서교예술실험센터 <99℃>, 서울무용센터 <dot> 등의 유망예술지원, 입주예술가 전시·공연 지원, 전문가·비평가 멘토링 지원 등과 같은 예술가 창작지원 프로그램과 [연극in], [춤:in] 등의 웹진 발간, <play-up 아카데미>, <서울국제안무워크숍> 등과 같은 다양한 장르 특화형 기획 프로그램들이 지난 10여 년간의 역사에 존재해왔다. 여기에 도시재생 또는 지역거점 문화공간으로서 <황학동별곡> 등의 지역축제와 ‘서교공동운영단’과 같은 거버넌스 운영 시스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시도한 <다빈치 크리에이티브> 등 다양하고도 과감한 실험과 시도가 이루어졌다.

3 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 2018 <예술로 상상극장>의 <거기 누구요> 공연 모습.
4 신당창작아케이드 아트마켓.

앞으로의 10년을 위해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날짜는 자신이 태어난 날과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알게 되는 날”이라고 했다. 그렇듯 이제 우리는 지나간 10년보다 앞으로 나아갈 10년을 이야기할 때다. 즉 창작공간 운영전략과 정책이 현재 ‘어디’에 있는가를 가늠해보고, 그렇다면 그다음엔 ‘어느 쪽’을 향해가야 할 것인지를 이야기할 때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10년을 맞은 창작공간이 창작·제작-유통·배급-향유·소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그 결과물들이 예술 생태계와 지역사회에 건강하게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려면 창작공간의 향후 10년은 어떻게 설계되어야 할까.
첫째, 예술의 자발성에 기초한 행정과 현장의 실질적인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일찍이 칭기즈칸은 “성을 쌓는 자는 망한다”고 했다. 결국 자기 틀안에 안주하는 것을 경계한 말로 단단한 자기 울타리, 두꺼운 허물을 벗어던져야 새로운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창작공간 또한 기존의 관리와 지원 중심의 공공행정의 틀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삼류배우는 자기 연기에만 신경 쓰지만, 일류배우는 상대방과의 호흡을 더 중시하는 것처럼 창작공간, 그리고 예술 영역을 둘러싼 예술가, 기획자, 연구자, 지역 활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소통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공동 운영 체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그들과 다리를 놓을지, 벽을 쌓을 것인지는 향후 공간 운영 성패에 중요한 축으로 작동할 것이다.
둘째, 공간별 특화에 기반한 통합형 기획이 필요하다.
이제 10년 남짓의 역사를 갖는 창작공간은 개별적으로 또한 장르적으로 너무도 많은 성과를 이루고 또 축적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하나 ‘점’처럼 분절적이어서 하나의 ‘선’으로 잇고 연결하는 기능, 그 성과들을 구조적으로 아카이빙하거나 장르 간 융합과 결합, 그를 위한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담아낼 수 있는 통합 시스템이 부재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분산 운영의 강점은 활용하되, 정보는 통합·집중하고 큰 틀의 운영 전략하에 창작공간들이 긴밀하게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지속적인 자원·정보의 공유, 입주예술가를 비롯한 다양한 인적자원과 기획사업 등의 DB 구축, 공간 운영의 노하우 교환, 공간과 공간을 매개하고 연결하는 다양한 네트워킹 사업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각 공간별 예술자원과 기획력을 원천으로 한 프로젝트 기반의 창작공간이 되어야 한다.
참고로 지난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재단의 예술지원 업무가 각 공간으로 이관된 바 있다. 예술지원의 현장성과 전문성을 높이고자 했던 정책이지만, 국비매칭형 지원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기에 본래 의도한 목적보다는 행정의 비효율성을 초래했다는 판단하에 올해부터 다시 창작공간과 분리되어 진행하고 있다. 물론 당연히 재단의 예술지원과 예술가 레지던스는 긴밀히 연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전 몇 년의 창작공간 운영이 예술지원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각 창작공간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입주예술가들의 제안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기획형 사업이 그 중심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나무가 10만 그루나 있는 숲에도 똑같은 모양의 잎사귀는 단 한 쌍도 없고, 같은 길을 가더라도 두 사람의 여행이 똑같을 수는 없다고 한다. 창작공간을 둘러싼 각기 다른 환경과 여건, 활용 예술자원, 장르의 특수성, 지역적 연결성까지 해당 창작공간만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기획사업이 펼쳐져야 한다. 여기에 직원들은 단순한 문화행정가, 공간관리자가 아닌 사람-사람, 사람-자원, 자원-자원을 잇고 연결하고 배분하는 역할을 해야 할 뿐 아니라, 그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하고 동행하는 플랫폼 기획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외에도 열악한 시설환경 개선 등 안정적인 창작환경 제공, 입주예술가의 새로운 실험과 연구를 위한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 등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불교 용어에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말이 있다. 그릇된 것을 깨뜨려 없애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각 창작공간들이 지금까지 담고 쌓고 이룩한 성과들은 더욱 빛나게 하되, 잠시 놓치거나 어긋났던 실행적 오류는 과감히 던져버리고 정책과 현장, 예술과 지역이 함께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정책적 실험을 시도해야 한다. 잘 보관된 호미는 그저 녹이 슬 뿐, 밭고랑에 있을 때 비로소 온몸으로 빛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제 가을이다. 본격적인 수확의 계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곡식도 과일도 어느 것 하나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없다. 그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가 들어섰을 것이고, 무서리 몇 밤, 땡볕 한 달이 들어가 비로소 붉게 여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
“내게 나무를 벨 시간이 8시간 주어진다면, 그중 6시간은 도끼를 가는 데 쓰겠다”라고 했던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처럼 무언가 ‘되기’ (be) 위해서는 반드시 지금 이 순간 무언가를 ‘해야’(do) 한다. 진정한 비교의 대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있듯 10년을 맞이한 창작공간이 잘 익은 감처럼 온몸으로 물들어 드러내 보일 수 있도록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매는 마음으로 지난 10년에 부끄럽지 않을 또 다른 10년을 준비해본다.

글 백승우_서울문화재단 공간기획본부장
사진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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