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디자인/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산림동의 유휴공간에 젊은 작가들이 둥지를 틀면서 동네의 분위기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을지로 디자인/예술 프로젝트: 산림동 골목에 새바람이 불다
지하철 을지로3가역과 을지로4가역 사이 청계천 일대는 조명, 가구, 타일, 금속가공업체 등이 밀집된 지역이다. 이 일대에 남북으로 길게 건설된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구불구불하고 좁은 골목이 실핏줄처럼 뻗어나가 있고 골목의
사이 사이를 작은 공장들이 채우고 있다. 청계상가를 비롯한
을지로 일대의 풍경은 이곳을 자주 찾지 않는 이들에게는 놀라운 것들이다. 손으로 쓴 낡은 간판과 90년 된 일본식 가옥,
작은 공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낯선 부품과 기계는 ‘이 물건은 대체 무엇이고 어디에 쓰이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동시에 압도적인 에너지와 활기를 전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현재도 2,300개가 넘는 업체가 넓지 않은 공간을
이웃하며 일대의 산업을 움직이고 있다. 이곳이 친숙한 이들은 주로 무언가 ‘만드는’ 이들일 것이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이라면 아무래도 재료를 사거나 작업을 하며 자주 오게 되는 곳이니 친근하죠.” 디자이너 소동호 씨의 이야기다. 그는 고향 같은 산림동 골목에 2015년 동네 이름을 딴 ‘산림조형’이라는 작업실을 꾸렸다. 비슷한 시기에 근처 골목 안의 흉흉하게 비어 있던 공간 6개에 그를 포함해 8팀의 청년 예술가들이 들어왔다. 중구청에서 진행한 ‘을지로 디자인/예술 프로젝트’가 그 계기다.
을지로 디자인/예술 프로젝트는 을지로 내 산림동의 빈 점포를 중구에서 임대해 청년 창작자(만 19~39세)들에게
작업공간으로 제공하는 프로젝트다. 2015년 여름과 2016년
봄 두 차례 공모를 통해 선정된 팀들은 임차료의 10%와 운영비만 부담하는 조건으로 2년 동안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산업 전성기가 지나고 재개발 지역으로 묶인지 30년이 지났지만 여러 이유로 개발에서 멀어진 을지로
일대는 여전히 작은 공장에서 기계가 돌아감에도 ‘쇠락’의
이미지가 강했고, 실제로 비좁은 골목을 낀 오래된 건물에는 비어 있는 공간이 많았다. 해가 지면 몰라보게 을씨년스럽던 이곳은 젊은 창작자들이 자리를 잡고 지역과 연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조금씩 그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구에서는 도심 공동화 문제를 개선하고 청년 창작자들은 저렴한 임
차료로 작업실을 쓰면서 자신의 작업을 이어갈 수 있어 양측
두루 반응이 좋다.
“작업실을 지원받고 을지로와 관련된 프로젝트도 할 수
있으니 제 입장에서는 좋지요. 이곳 장인·상인 분들도 젊은
사람들을 반겨주세요. 지역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할 때 옆집
사장님께 도움을 청하면 이것저것 알려주시면서 다른 분들을 소개해주시고, 그러면서 관계가 쌓이고요.”
지역의 자원을 활용해 가구와 조명 등을 만드는 소동호
작가는 지난해 4월부터 시작된 을지로 투어 프로그램 ‘을지유람’의 지도를 제작했고, 타일·도기 업체가 특화된 점을 모티프로 을지로3가 버스정류장의 의자를 작업했다. 을지로
디자인/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한 다른 팀도 각자의 영역에서 지역연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창작과 예술교육을 병행하는 예술단체 ‘R3028’은 산림동 예술길 프로젝트와 공동체를 위한 공간 마당(maDang) 조성 사업 등 문화 정비사업을,
디자인 스튜디오 ‘서클활동’은 이 일대에서 생산되는 금속재료나 가공 기법을 활용한 제품 생산(‘을지생산’ 프로젝트)을
진행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현지 작가는 작업실 이름을 ‘이현지 을지로기록관’이라 짓고 근대의 풍경이 아직
남아 있는 을지로를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낸다.
프로젝트가 진행된 지 1년 남짓. 많은 부분에서 결실을
거둔 프로젝트와, 이제 막 활성화하기 시작한 청년 지원과
정책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소동호 작가에게 물었다.
“일단 천천히 갔으면 좋겠어요. 청년 창작자의 유입으로 활성화되는 게 분명 좋은 효과도 있지만 작가 입장에서는
성과가 부각되고 뭔가 빠르게 진행될수록 우려가 생기는 게
사실이거든요. 청년 지원 정책도 청년 당사자와 그가 연계된
지역 등이 실질적으로 발전하는 데 어떤 환경이 필요한지 면밀히 살펴보고 지원의 기간을 달리할 수 있었으면 해요. 단기간에 충분히 끝낼 수 있는 프로젝트도 있지만 지역과의 관계성이 중요한 작업의 경우 2년이 부족할 수도 있거든요.”
최창식 중구청장은 지난 12월 22일 을지로 디자인/예술
프로젝트의 16개월을 살펴보고 앞으로의 프로젝트 진행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마련된 워크숍 자리에서 “을지로의 골목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새로워졌다. 앞으로도 이들의
활동을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지원 영역을 넓혀나가겠다”고
말했다. 기존과는 다른 세대(청년)의, 다른 종류의 ‘만들기’를
이어가는 이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산림동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가 가능하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지원의 폭을 좀 더 넓히면서 천천히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청년청: 놀고 생활하고 생산하는 ‘청년의 서식지’
청년청은 은평구 서울혁신파크 22동에 자리한 공간으로 지난 2015년 9월 57개 단체가 입주를 시작하며
문을 열었다. 같은 해 11월 서울시는 청년을 대상으로 한 장기 종합계획으로 ‘2020 청년정책 기본계획’을 마련했다. 이 계획은 청년의 일자리(취업 지원),
설자리(청년수당 지원), 살자리(주거 지원), 놀자리(청년 활동공간 마련) 마련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 청년청은 이 중 ‘놀자리’의 하나로 마련된 공간이다. 청년청이라는 공간에 대해 어떤 목적을 열거하기
보다 ‘청년의 서식지’라는 키워드로 설명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놀이, 커뮤니티 활동, 생산적인 작업 등 다양한 활동이 벌어지는 곳이라는 의미다. 입주자를 모집할
때에도 특별한 자격 조건 없이 ‘서울에서 활동하고 대표자가 만 19~39세인 곳’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뒀다. 청년청의 최진 공간조성팀장은 서울시내 창작공간과 공유공간
등 청년 세대에게 지원되는 여러 공간과 청년청의 대표적인
차이에 대해 ‘입주자가 특정한 장르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다. “현재 지자체에서 지원되는 공간은 크게 창업
공간과 예술가 창작공간으로 양분되는 경향이 있어요. 그중
창작공간은 장르별로 특성화돼 있고요. 청년청은 특정 장르에 속하지 않는 다양한 이들이 모여 있어서 시너지가 생기기 좋아요. 정말 열심히 일하는 팀이 있는가 하면 이제 막 시작하는 팀이 있는데 그들이 만나서 서로 조언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협업 관계도 생기거든요. 새로운 게 발생하려면
서로 이질적인 것이 부딪쳐야 하는데 청년청이 그런 공간인
거죠.”
현재 자리(서울혁신파크 22동)에 호텔 건립이 계획돼
2017년 2월에 건물이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다행히 철거가
미뤄져 청년청은 3년의 기간을 보장받았다(3년 안에 호텔
개발이 진행되면 그에 상응하는 공간으로 이전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건물 1층에는 55개 단체가 초기 입주할 때 약속했던 ‘공용공간’의 공사가 마무리돼가고 있다. 이곳은 청년청의 입주자가 아닌 일반 시민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될 계획이다. 특히 청년(만 19~39세) 중 경력단절여성이 많은 점에 착안해 이들이 참여하는 워크숍을 입주
단체들이 기획해 진행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청년의 ‘해 볼 만한 공간’은 ‘함께 해볼 만한 공간’으로, 사람과 공간이
가진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다.
1
청년청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입주자들이
모여 ‘반상회’를 진행해
공간 운영과 활동에
관한 안건을 논의한다.
2
세운상가에서 진행된
‘비둘기 오디오&비디오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영상 설치 작품.
3
무중력지대 G밸리 전체
공간.
4
무중력지대 대방동
전체 공간.
세운상가: 예술가와 메이커, 장인을 연결하는 문화예술 플랫폼
1968년 건립된 세운상가는 아날로그 기술의 메카였다.
1980년대 이후 쇠락의 길을 걸으며 한때는 도심의 애물단지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이곳은 여전히 전기·전자제품의 집산지이자 뛰어난 기술을 가진 원조 메이커들이 모인 곳이다.
서울시가 세운상가 재생 프로젝트를 시작한 2015년부터는 오랜 시간 이곳을 지켜온 기술 장인과 젊은 메이커, 그리고 세운상가 일대의 예술가들을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변화했다. 세운상가 일대는 저렴한 임차료와 편리한 교통, 다양한 제조 기반 인프라 등의 이점이 있어 2~3년 전부터 젊은 창작자들이 둥지를 틀기 시작했는데, 현재는 개방형 스튜디오 ‘Slow Slow Quick Quick’, 메이커를 위한 작업공간
‘FabLab Seoul’ 등 36개의 창작공간·단체가 입주해 있다.
곳곳에 자리 잡은 젊은 예술가들은 참신하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세운상가에 새 숨을 불어넣었다. 서울시에서도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는데, 세운·청계·대림상가 지역의 활성화와 공동체 발굴을 위해 진행된 주민공모사업 ‘다시·세운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다시·세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된 ‘2016 세운상가 좋아요 대림상가 좋아요 청계상가 좋아요: 비둘기 오디오&비디오 페스티벌’은 을지로·청계천 인근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문화예술창작단체들이 직접 기획한 축제로, 세운상가의 공간성을 오디오·비디오 작품에 담았다.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행사도 개최됐다. ‘다시 세운 꽃찬길: 인피오라타 2016 in 세운’은 도로와 거리를 캔버스 삼아 꽃잎과 나뭇잎 등으로 모자이크 형태의 꽃 그림을 완성하는 인피오라타(INFIORATA)를 선보였고, ‘다시 웃는 세운상가’는 이목을 화가의 대형 스마일 그리기 퍼포먼스와 함께 시민들의 그림과
메시지를 트리에 장식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장인의 기술과 예술가의 상상력을 융합한 작품 전시를
중심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서울상상력발전소’,
청소년의 창작활동을 대안교육과 접목한 ‘손끝기술학교’ 등
세운상가는 지금 젊은 예술가들과 기술 장인, 시민들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고, 공유하고, 협업하는 새로운 문화예술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무중력지대: 취업과 먹고사니즘의 무거운 중력으로부터 잠시 쉬어가는 곳
서울시 청년공간 ‘무중력지대’는 청년들을 구속하는 사회의
중력(끊임없는 경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공유공간이다. 안정적으로 활동하는 데 필요한 공간이 마땅치 않다는 청년들의 고민을 바탕으로 기획되었고 서울시의 협력으로 2015년 4월 28일 탄생했다. 일,
공부, 창업, 토론, 모임, 문화활동 등 다양한 청년활동에 열린
공간이며, 나아가 취업, 주거, 생활 안정 등 청년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 역시 지원한다.
무중력지대는 대방동(무중력지대 대방동)과 가산디지털단지(무중력지대 G밸리) 두 곳에서 운영되는데, 이 두 곳의 성격이 조금 다르다.
대방동은 노량진 학원가와 가까이
있는 특성에 기초해 취업, 주거, 생활
안정 등 청년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과 교육 및 프로젝트를 지원한다. 삼각김밥과 편의점 도시락만 먹던 청년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는 ‘나눔
부엌’, 저렴한 비용으로 대여해 작당 모의를 할 수 있는 ‘워크숍룸’이 마련돼 있고 저렴한 가격으로 서로의 재능을 나누는
공유경제 방식의 프로그램 ‘재능나눔’이 펼쳐진다. 이와 달리 무중력지대 G밸리는 가산디지털단지에서 근무하는 청년 직장인을 위해 커뮤니티 활성화, 역량 강화, 일자리 지원,
공동 프로젝트 등의 사업을 진행한다. 월요일 아침에 함께
요리하고 식사를 나누는 ‘월요브런치’ 시간이 마련되며 연기와 드로잉, 시 창작 클래스 등이 개설돼 있는 직장인 예술대학 ‘G밸리 아트 유니’, 청년 직장인 및 청년 구직자의 스터디
그룹 활동을 지원하는 ‘힘을 내요 스터디 파워’ 등이 운영된다. 이 밖에 청년 문제 해결과 관련한 강의 및 교육 프로그램이 수시로 마련된다.
지금까지 무중력지대를 이용한 사람은 약 6만 명. 이용자 숫자로는 국내 공유공간 중 최고점을 찍었다.
- 글 이아림, 조아라
- 사진 김창제
- 사진 제공 청년청 youthfield.kr서울시 도시재생본부 역사도심재생과 서울시 청년공간 무중력지대youthzone.kr